grown-ups' fairy tale (강해준)


b.g.m Suite for Solo Cello No.2 in D minor Bach 1008 I, Prelude.


차장과 나갔던 거래처 미팅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 참이었다. 상대방도 만만한 카운터 파트는 아니었기에 한참이나 늦어 질 줄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던 것과는 달리 순식간에 협의는 이루어 졌다. 차장은 맥주 한잔 같이 기울이며 저녁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해준은 간단히 고개를 숙이고 먼저 들어가보겠다 말을 끊어 내었다. 돌아 서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사무실, 제 내선 번호와 뒤 두 자리만 다른 번호를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었다. 세 번이 울리고 녹음이라도 된 것 같이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감사합니다. 원인터네셔널 철강팀 장백기 입니다.’ 


“뭐해?”
“대리님이십니까?”

 멍청한 대답에 코웃음이 난다. 그럼 대리님이지 사장님이겠어. 해준은 오랜만에 홀가분해진 마음 덕분인지 취미에도 없던 농담이 튀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택시 기사에 저도 모르게 제 아파트 대신 백기의 맨션 주소를 부르고 시트에 몸을 뉘였다. 수화기 너머로 고요한 숨소리가 들린다. 타닥 타닥 자판을 두들기는 건조하고 규칙적인 소리도 멀리서 들려온다. 어깨와 귀 사이에 수화기를 끼워 넣고 자판을 두드리는 백기의 옆얼굴이 그러지는 것 같다. 해준은 눈을 지긋이 내리 감았다. 막 퇴근한, 장백기의 셔츠에서 나는 희미한 살냄새와 특유의 값비싸고 귀한 코오롱 냄새가 그리워 지는 순간이었다.

“어제 입찰 보고서 마무리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 하는 중이었습니다.”
“얼마나 남았어?”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해준은 왼손목의 손목시계를 흘끔 내려다 보았다. 두 시간 후면 정확히 퇴근시간 후다. 시간 배분도 귀신같이 효율적으로 하는 녀석이다. 몸에 벤 듯 계획과 실천이 맞물리는 사내. 해준은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만지작 거리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잠시만요 대리님.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무색하게 끊긴 전화가 못내 아쉬워 해준은 핸드폰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망연히 내려다 보기만 했다. 동지가 지났다지만 아직 겨울의 허릿춤이다. 택시를 탈 때까지만 해도 뉘엿뉘엿 해가 지는 듯 하더니 벌써 해가 다 넘어가고 어두컴컴 한 땅거미가 내려앉은 참이었다. 해준은 이 무렵의 이 지독한 고독과 서늘한 외로움이 자신을 관통해 가는 것을 도무지 못 견뎌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벌집같은 사무실에 갇혀에 이런 시간의 하늘에 노출되어 있던 적은 주말을 제외하고는 없었는데. 오늘은 내빼지도 못하게 러시아워 강남 테헤란로의 한복판, 택시 안에 갇혀서 택시기사와 나란히 이 시간을 공유 하고 있다. 해준은 시트에 제 고개를 처박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릎 위에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해준은 속으로 다섯을 센다. 이럴 땐 정말이지 자신이 진절 머리나게 싫어진다. 장백기는 사무실 안에서 전화 받는 것이 불편한 모양인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장백기. 핸드폰 액정화면에 떠오른 그의 이름을 만지듯이 해준은 엄지손가락으로 짧은 간격을 두고 점멸했다가 다시 나타나는 전화 수화기 모양의 버튼을 밀어내듯 건드렸다.

“응”
“미팅 일찍 끝나셨다면서요.”
 “응”
“식사는요.”
“생각 없어.”

생각 없긴요. 당신은 식사를 생각으로 먹습니까. 백기의 여전히 표정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소가 바뀌었다고, 뻔뻔스레 호칭이 바뀐, 장백기의 셔츠를 입은 커다란 등허리를 상상해 본다. 결벽적이고 금욕적인, 감정이라고는 잘 떠오르지 않는 사내가, 셔츠를 벗은 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오롯이 저의 앞에서 뿐일까. 해준은 그런 자조적인 의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몇번이나 꾹꾹 눌러 담았다. 전화를 하기 위해 담배를 곧잘 피우곤 하는 옥상으로 올라간 모양인지 세찬 바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장백기의 숨소리와 뒤섞여 들려온다. 담배를 태우려 라이터를 당기는 소리도 들린다.

“저희 집 가 계실래요.”
“…”
“밖에서 기다리시지 말고 들어가 계세요. 대리님. 저 금방 끝내고 가요.”

해준이 벌써 택시 기사에게 저의 집 주소를 대었다는 것으 모르는 모양으로, 마치 대단한 것을 부탁하는 것처럼 깍듯한 백기의 말에 해준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듯한 서글픔을 느꼈다. 네? 대답 없는 해준에게 몇 번이고 다그쳐 묻는 백기는 해준이 어서 들어가서 일이나 하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듣고서야, 오늘 추워요. 꼭 안에 들어가 계세요. 하고 다짐을 한 번 더 하고 전화를 끊었다.


*   *   *


해준은 주인 없는 장백기의 아파트에 들어오자 마자 브리프 케이스를 소파 위에 던져 놓고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일주일에 세 번, 장백기가 출근으로 집을 비운 사이 집안일을 봐주는 아주머니가 다녀간다는 사실을 해준은 익히 알고 있었다. 덕분 장백기의 주방 양문형 냉장고에는 사내 혼자 사는데 챙겨 먹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과하고 조금 지나치게 깔끔한 반찬 통들이 벽돌처럼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김치만 해도 익은 김치, 갓 해놓은 겉절이 김치 깍두기와 파김치까지 네 종류나 되었다. 몸은 건장한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건강관리에 욕심이 있는 타입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원료를 알 수 없이 비닐 팩에 포장 해 놓은 건강 음료따위가 냉장고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무심하게도 그 양은 절대 줄어 들지 않는다. 어쩌다 그 안의 것을 탈탈 털어 해준의 집에 옮겨 놓는 것이 누군가 정성스레 채워 넣었을 것이 분명한 그 것들을 해치우는 장백기의 유일한 방법. 해준은 그 따위 것 언제나 탐탁치도 않았지만, 정작 저는 손도 대지 않는 것을 해준이 거들떠 보지 않는 다는 이유로 몇번 싫은 소리를 하더니, 이젠 집에 옮겨 놓는 것은 그만두고 사무실로 직접 배달하기에 이르러 매일 배급받듯이 해준에게 친절하게 빨대까지 꽂아 들이 밀어지곤 했다.

냉장고 안의 적당한 지저분함도 용납하지 않는, 사람 사는 생활감은 느껴지지도 않는 모델 하우스 같은 장백기의 집, 그 것은 장백기의 인생의 축소판 같다. 마치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듯 모든 것이 셋팅 되어 있는 주방 구석구석. 그러나 주인이 이 주방을 쓰는 일이라곤 꽤나 복잡해 보이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내려, 커피를 얻어 낼 때 정도일 뿐일 것이다. 성인에 직장인이라 해도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을 넘긴 사내를 이런 멘션에 혼자 내던져 두는 그의 가족은 어떤 사람들일까, 냉장고에 차곡 차곡 쌓여가는 제철 음식들과 늘 누군가 세심하게 손을 탄 것이 분명한 그의 보금자리, 그러나 그 보금 자리에 조차 오래 머물지 않고 떠돌아 다니듯 집을 옮겨 사는 장백기. 그 기묘한 간극 사이에서, 장백기는 날 때부터 천둥벌거숭이로 홀홀 단신 살아 온 것처럼, 일주일에 세 번, 고용인의 훈련된 보살핌 만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시시콜콜 가족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다정한 사이도 아니었으나, 분명 해준은 예감 하고 있었다. 장백기에게는 결핍된 것이 있다. 해준의 밑으로 처음 들어와 일을 배울 때부터 해준은 장백기의 단단한 표면 내면에 숨어 있는 명백한 그 빈곤한 자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장백기의 정돈된 표정과 가끔 사람의 속을 뒤집어 지게 할 만큼 감정에 냉담한 행동 방식들은 이런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해준은 장백기를 처음 만난 이후로 줄곳 그를 두려워 했고 또 동시에 동정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결함보다 감정적으로 망가진 인간을 함부로 자신의 영역에 끼어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해준은 장백기를 어쨌거나 업무 파트너로 만들어야 했고 자신이 이미 파악해 버린,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절박함이 없는  장백기의 감정적인 결핍을 어떻게든 훈련으로라도 보수를 해두어야만 했다. 하여, 해준은 전혀 장백기를 부사수로 받은 이후 꽤 오랜 시간동안 그에게 일을 주지 않았고, -그러니까 장백기가 '일'이라고 생각될 만한 일말이다.- 거기에 장백기의 반응은 해준의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끝없는 반발과 자기 증명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계속되는 해준과의 마찰.  그런 장백기의 행동의 대전제에는 최소한 강해준이 있었다. 장백기는 강해준에게 가끔 반발하거나 따져묻거나 심지어 회사를 그만두고자 했어도, 자신을 이렇게 흔들어 놓는 하나의 존재가 강해준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도전받거나 부정당하거나 흔들려 본적이 없는 것처럼 장백기는 면역력없이  온 세계를 부정당한 인간처럼 절박하게 해준을 뒤쫓았다. 장백기의 모든 감정 해석능력이 오작동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강해준이란 인간은 무엇이기에 자신은 그에게 인정받기를 이토록 갈망하는가,로 시작해야 했던 장백기 안의 의문은- 결국 전제를 잃어버리고 저로 하여금 강해준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게 했다. 


인간이란 단순하고 무지한, 호르몬이라는 화학적 물질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인정의 욕구가 육체의 욕망으로 치환되는 것도 결국은 호르몬의 장난일 뿐이다. 해준은 기꺼이 장백기의 호르몬이 오발되는 것을 두고 보았으며, 자신에게 동정을 구하며 파고드는 그를 받았다. 저로부터 시작된 비틀린 관계 속에서 장백기는 나름의 방법으로 적응하고 있었다. 해준은 아직도 백기와 몸을 섞은 다음 날 아침의 장백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그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긴 손가락 끝에 걸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사내의 표정을 잊을 수 가 없다. 그런 것 치고, 장백기는  해준의 예상을 뛰어넘어 아주 잘 적응 하고 있는 셈이었다. 


수입산 맥주와 식전 주로 마시는 달큰한 아페티리프가 냉장고 문에 달린 음료 칸에 줄지어 서있다. 해준은 거기서 푸른색 라벨이 적힌 맥주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뚜껑을 따고 냉장고 문도 닫지 않고 열린 문 밖으로 서늘한 냉기가 스며 나오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 들이며 한 모금을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셨다. 순전 장백기의 취향에 기인한, 해준으로서는 전혀 취미 없는 드라이하고 차가운 맥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독특한 식감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가슴팍의 셔츠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주어 넣었던 핸드폰이 동시에 진동해서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꺼내 액정화면을 들여다 본다. ‘지금 출발해요. 차 막혀서 좀 늦을 거에요. 쉬고 계세요’. 이모티콘 하나도 없이, 띄어쓰기와 맞춤법이 완벽한 후배의 문자 메시지를 내려다 보고, 해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나 더 늦는다고. 주인도 없는 빈집에 혼자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나. 해준은 막연하게 후회했다. 그래도 이미 늦었다. 일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한낮 내내 쓸고 닦아 놓아 사람의 체취라고는 없이 유리 성벽같이 깨끗하기만 했던 장백기의 맨션은 순식간에 해준의 체취로 가득 찼다. 


그렇게 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자, 이렇게 되었을 바이야, 어디든 굴러다니며 장백기가 어디에서도 제 냄새와 제 흔적을 찾게 영역이라도 표시 해 두고 싶은 심경이 되었다. 해준은 맥주 캔을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맨질 맨질한 벽을 짚으며 집안을 둘러 보았다. 장백기의 이사한 새 아파트에는 방이 세 개였다. 하나는 옷 방으로 쓰는 모양으로 들어 가자마자 벽의 삼면이 잘 짜여진 원목의 옷장으로 들어차 있고 출근용의 멀끔한 수트가 주욱 걸려있다. 수트 아래에는 셔츠가 색깔 별로 다림질 되어서 걸려있고 넥타이는 중앙의 아일랜드 클로짓에 돌돌 말려 십수 개가 모자이크 처럼 사각의 칸막이에 채워져 있다. 마치 텔레비전에서 연예인들이 선심 쓰듯 공개하는 드레스 룸처럼 흠 하나 없고 정돈된 한 평 남짓 장백기의 세계. 해준은 신세계에 온 듯이 고개를 쳐들어 그것을 죽 둘러 보았다. 장백기의 냄새와 장백기의 색으로 가득 참 사각형의 공간.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때, 어울리지 않게 벽에 오도카니 걸려있는 가늘은 줄무늬가 그려진 셔츠 한 장. 어떻게 보아도 장백기의 셔츠라고는 볼 수 없는 아담한 사이즈의 드레스 셔츠가 옷장 밖에 동떨어져 얌전히 벽에 붙어 있는 것을 해준이 고요히 올려다 보았다. 아무도 입지 않은 것 같이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의 소매를 해준이 한번 쥐어보았다.


 타인에게 옷을 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해준은 생각했다. 그것은 복잡한 일이다. 해준은 한번도 상대에게 옷을 선물해 준 적은 없었다. 선물을 받아 본적은? 글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해준은 장백기의 옷 장에 걸린 전혀 낯설은, 사내의 옷 한 벌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그것의 의미에 대해 곱씹고 있다. 명석하고 빠른 두뇌는 제 자기 보호 본능을 배반하고서, 너무나도 자연스레 장그래가 그것을 입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본다. 체구가 작고 마른 장그래가 손으로만 만져봐도 부드럽고 누군가 그의 체형과 얼굴색을 고려해 세심하게 골랐을 것이 분명한 이 셔츠를 입고 있다. 해준은 들고 있던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 벌컥 벌컥 들이켰다. 벌써 냉장고 속의 냉기가 식어버린 것인지 제 몸이 그만큼이나 차가워져 버린 것인지 시원하게 청량감 따위는 사라지고 미적지근한 목 넘김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   *   *


 ‘안녕하십니까. 올해 인턴으로 원인터네셔널에 입사하게 된 장백기입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인턴사원들에게 임의로 나눠주는 임시 사원증이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렸다가 그가 허리를 일으키자 다시 가슴팍에 들러붙었다. 당찬 제 소개 인사말 과는 달리, 눈썹 뼈 아래로 움푹 들어간 눈매가 서늘하고 차분해 보였다. 목소리는 아직 앳된 티를 버리진 못했으나 다,까로 끝나는 깍듯한 말버릇이 그다지 나쁘진 않은 것 같네, 해준은 생각과 동시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모니터만 바라다보며 피식 웃었다.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길게 펴서 안경을 끌어 올리는 것이 버릇인 듯 보였다. 약간 고개를 숙이니 얼굴이 그늘이 내려 앉아 깊은 눈매가 안경에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났다. 성준이 밑에선 고생 할 텐데. 수고 많겠네. 해준은 선심쓰듯 고저 없이 주억거리 듯 말을 내 뱉았다. 백기는 고개를 들어서 해준을 마주보았다. 잘부탁 드립니다. 강…해준 대리님. 저의 사원증을 내려다보고 백기가 드문드문 입을 열었고 성준이 고생 함서 배우는 거지! 그지, 장백기. 하고 호방하게 웃으며 백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성준이 제 밑으로 인턴 하나가 들어왔다며 떠들어 대며 15층 온갖 데를 데리고 다니며 인사를 시키는 모양이었다. 다소 당황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장백기는 그렇게 하성준의 뒤를 쫓아 다니며 여기저기 얼굴도 낯설은 상대에게 제 소개를 해야 했다. 어디 인턴이 장백기 하나던가. 성준이 유난을 떤다고 투덜대는 치들도 있었지만 그 뒤에 달려 붙은 총명해 보이는 사내아이에게 불만을 품는 사람은 최소한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해준은 장백기, 하고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 청량한 사내의 얼굴과 이름을 다시 떠올려 봤다.


*   *   *

‘너 그 넥타이. 일단 나랑 바꿔’ 


해준은 처음에는 옥상의 심한 욋풍에 제가 소리를 잘 못 들었나 싶었다. 회사 안에서는 서로 바라보고 눈인사도 나누지 않던, 아니 웬만한, 딱 인간적일 정도의 오만함으로 일방적으로 저의 동기들 중 가장 '스펙'이 달린다는 장그래만을 외면하던 장백기가 예의 그 매끄럽고 서늘한 생김새와는 달리 조금 미성숙한 목소리로 그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해준이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생김과 목소리가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다. 너. 나. 그런 가볍기만 한 호칭들이 늘 회사 안에서 딱딱하게 굳어 다, 나 까로 말을 끝내던 장백기에게서 흘러나오자 외려 지나치게 부드럽고 낯간지럽게만 느껴졌다. 해준은 물고 있던 담배의 불을 붙이는 것도 잊고 멀찌감치 난간에 걸터 앉아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둘을 바라다 보았다. 


고층건물 옥상인 지라, 바람이 거세어 지고, 해준의 블레이져 안으로 스산한 가을 냄새가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그래가 잠자코 대답이 없자, 백기는 피우던 담배를 담배곽에 비벼넣으며 끄고 들고 있던 펜을 셔츠 포켓에 떨어뜨려 넣으며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넥타이 매듭을 잡아 당겨 풀어 내었다. 차분한 네이비 컬러에 아주 미세한 무늬가 들어가 있는 실크 넥타이였다. 매듭은 쉽게 스르륵 풀어져 내려갔다. 백기는 넥타이를 다 풀어 길게 펼쳐 보이며 그래의 눈앞에 그것을 내민다. 옥상에 바람이 휘몰아 치자 넥타이의 아랫자락이 팔랑거리며 둘 사이를 춤추는 듯이 크게 움직였다. 


해준은 그 들이 하는 양을 고요히 지켜보았다. 검정고시로 득한 고등학교 졸업장에 몇 가지 자잘한 컴퓨터 능력이 자격의 전부라는 덜 떨어진 스펙의, 드라마틱한 인턴사원과 누가 뭐래도 합격은 따놓은 당상에, 일등입사이냐 이등 입사이냐를 두고 겨루는 으레 인턴 기수 중에 한두 명씩은 나오기 마련인 ‘선수’가 마주한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 따위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것도 그 인턴의 승패를 겨루는 마지막 PT날 아침이었다. 


‘그것 벗고 이걸루 해’
‘왜.’
‘너랑 안 울리니까’
‘…’
‘이거 에르메스야. 너 에르메스라고 알어?’


 해준은 동네 길 고양이도 꼬여내지 못할 그 무뚝뚝한 말투에 둘을 들여다보면서도 백기의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장백기는 건방지게 지껄이면서도 짐짓 태연했고 장그래는 그런 장백기의 얼굴을 바라다만 볼뿐 더 다가가지도 멀어지지 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몇 시간 후면 저의 운명이 결정될 참이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한 장그래는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녀석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루 해 이리와봐’ 


제 넥타이를 여전히 길게 들고 백기가 손을 까닥까닥, 더 다가오지 않고 경계심에 가득 찬 초식동물 같은 그래를 불렀다 그러나 다가간 것은 백기였고 그래는 여전히 멈추어서 있었다.


'시대가 어느땐데 이런 넥타이를 하구다녀 목도 가늘은게 넥타이가 너를 매겠네'


백기를 허리를 숙이고 저보다 키가 작은 그래의 목에서 한눈에 봐도 유행이 한 참 지난 것일 게 분명한 폭이 넓은 단색의 넥타이를 끌러내면서 짓궃게 말했다. 늘 창백하리 마치 하얀 얼굴에 안경으로 표정을 가리고 입을 일자로 다물고 책상에 앉아 있던, 하성준이 호방하게 웃으며 등을 두드리거나 해도 겨우 슬그머니 입술 끝을 당겨 웃는 것이 리액션의 전부인 그 '서울대 출신'에 정규 입사만 한다면야 모든 부서들이 신입으로 원하는 블루칩 장백기가 맞나 싶은 순간이었다. 


'장백기씨'
'...'
'장백기씨'
'그놈의 장백기씨 타령좀 그만 할 수 없어?'


별 스럽지 않게 대꾸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넥타이 매듭을 다듬어 주는 장백기의 손끝은 사못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장백기의 솜씨에 넥타이를 바꿔단 장그래의 얼굴은 훨씬 화사하고 샤프해 보였다. 장백기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한발자국 물러서서 벽에 그린 그림을 보듯이 장그래를 물끄러미 보고는 씨익 웃는다. 그리곤 장그래에게서 빼앗은 촌스러운 넥타이를 제 목에 두르고 매기 시작했다. 그런대로 덩치가 큰 장백기가 자잘한 줄무늬가 있는 셔츠에 매니 단색의 넥타이는 그렇게까지 촌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에, 해준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사회 물이라고는 먹지도 않은 풋내나는 녀석이었지만, 장백기는 그 외향만큼은 훌륭한 녀석이다. 해준은 팔짱을 끼고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우중충한 사무실 파티션 사이에 앉아 공장에서 찍어 낸듯 개성 없는 엘리트 지향의 속물 같았던 장백기는 지금의 장그래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내 다워 보였으며, 동시에 소년 같이 청명해보인다. 


'그래야'
'...'
'그래야'


다정하게 몇번을 부르자 고집스레 다물렸던 장그래가 입술을 열고 대답을 돌려 주었다. 


'왜'
'긴장마. 너 오늘 잘 할거야.'
'그 넥타이 아버지거야. 이따가 돌려줘.'


장백기의 대단한 격려의 말에, 장그래는 부끄러운 지 화제를 딴데로 돌려 변죽을 울리며 말했다. 가지래도 돌려 주려고 했어. 내 스타일 아니야. 장난스레 지껄이고는 장백기가 돌아섰다. 꽉 들어찬 넥타이를 맨 두녀석과는 달리 해준의 휑하니 비어버린 목덜미에 스산하게 바람이 들이쳤다. 해준은 웬지 모를 부아가 치밀어 신경질 적으로 라이터를 담배 가까이에 가져다 대고 몇번을 당겼다. 돌아서서  지상층 엘리베이터로 연결되는 입구로 향하던 장백기는, 순간 그런 해준을 발견하고 고개를 획 돌려 장그래를 바라다 보고는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되돌아 왔다.


'불 빌려 드릴까요?' 


해준이 대답도 하기전에, 성큼성큼 다가온 백기가 제 주머니속의 라이터를 당겨 해준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건조한 목구멍 깊이 뭉근한 담배연기가 스며들어오며 해준은 순간 눈앞이 팽팽 도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깊고 진한 머스크 향이 백기가 제 역할을 다 하고 꾸벅 고개인사를 하곤 스쳐지나간 이 후로도 오랫동안 남아 해준을 두통에 시달리게 했다.



*    *   *




 해준은 똑똑한 편이었고 무엇이든 빨리 배우고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옷을 입는 데에도 그런 습성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라, 서른이라는 나이에 이르자 해준은 남들 앞에서 튀지도 그렇다고 묻히지도 않을 만큼 적당히 있어 보이도록 옷을 입는 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옷을 입는 것보다는 옷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떤 것을 가졌느냐가 어떻게 쓸 수 있느냐를 결정하니까. 해준은 그래서 옷을 입는다는 행위 자체 보다는 고르는 행위에 더 많은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그래서 해준은 남이 사주는 옷에 욕심을 부려 본 적은 없었다. 남에게 옷을 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값비싼 과시욕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지독한 자기 만족일 수도있다. 그렇담, 장백기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강해준이 만든 인공의 공간 안에서 장백기는 벌써 장그래에게 줄 옷을 고르고 있다. 세심하고 유심하게 구석구석 살피면서 그 어느날 스산한 바람이 부는 공간에 마주서서, 해준이 저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제 값비싼 넥타이를 기꺼이 끌러 그래에게 걸어주었던 그 때처럼. 장백기는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사내의 얼굴을 하고, 또 소년의 얼굴을 하고 저를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해준은 한번도 자신의 옷차림이 초라하다거나 격에 맞지 않는 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실제로 그런 적도 없었다. 적당한 체격에, 취향이 독특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것이 저에게 잘 어울리는지도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시행착오를 통해 습득할 수 있었다.  그를 거쳐 간 몇몇 사내들은 결국 개똥 철학이고 넌 사치부리는 걸 좋아하는 게이일 뿐이라고 빈정대었지만, 그런들 어떠랴. 제 월급과 수준에 맞지 않게 화려하고 번쩍번쩍 한걸 몸에 지니기 위해 빚을 질 정도의 얼간이는 아니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해준은 본인도 괴로울 만큼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해준은, 장백기의 색과 장백기의 체취로 가득찬 이 방안에 덩그러니 걸린 이질감 넘치는 셔츠 한 장 앞에서 주제 넘게 값비싼 보석을 탐내는 탐욕스러운 계집애가 된 것 같은 수치심과 욕정을 느낀다. 내가 네게, 저걸 달라고 하면. 너는 줄수가 있나. 요 전밤 저의 안에 정을 토해내길 한사코 요구 했음에도 결국 그를 거절했던 장백기의 절박한 얼굴이 문득  생각 난다. 내가, 네게, 너를, 달라고 하면.


해준은 먹고 있던 맥주 캔을 아일랜드 클로짓에 그대로 올려 놓고, 드레싱룸을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이유없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거실에 아무렇게나 벗어 두었던 제 짐을 갈무리 해서는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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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5

폭풍같은 전개를 위한 지루한 한 편이라고 하면 안믿으실거죠?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grown-ups' fairy tale과 cruelty of adolescence는 기본적으로는

해준이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두 꼭지가 연작격으로 이어진다고는 하지만

grown-ups' fairy tale과 cruelty of adolescence가 꼭 같은 분량은 아닙니다.

쉽게 말하자면 grown-ups' fairy tale이 본편이고 cruelty of adolescence는 그 부록 쯤 이라고 보시면 될것 같아요.

(절대 제가 꼴리는 대로 써서가 아님...)


여러가지로 제가 써오던 그 어떤 글보다 꿍꿍이가 많은 글이라서 저도 벅차고

보시는 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궁금하지만 긴 소리 주절주절 하지 않고 (이미많이 했고...)

열심히 써보도록 할게요.

혹시라도 완결이 난다면, 그 이후에 뒷 후기를 쓰겠습니다.


달아주시는 코멘트 늘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제가 일이 바빠(는 핑계고) 접속을 자주 하지 못해서 답글을 혹시 못달아 들이고 놓치더라도 노여워 마세요

찬찬히 모두 인사드리려구 노력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실시간으로 제게 욕(...)을 하고싶으시면 트위터 @warick1808 로 멘션하시면 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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